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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여행 한 페이지로힝야 곁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6년 03월호

오랜만의 여행이자 개인 작업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참을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터라 미루고 미뤄둔 계획이 가득했다. 근 일 년을 매진했던 드라마 촬영이 끝났을 때 코로나로 봉쇄됐던 세계의 빗장도 열려 있었다. 여행에 대한 오랜 갈증을 해소할 시간이었다. 묵혀둔 수많은 계획 가운데 가장 먼저 꺼내 든 것은 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 캠프’ 방문. 큰 카메라를 들고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공동작업을 하다 작은 사진기 하나를 손에 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가볍고 기분 좋게 설레었다. 사진 기술을 부리는 데 필요한 액세서리는 챙기고 싶지 않았다. 맑은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함부로 동정하지 않으며, 무례하게 훔쳐보지도 않으며, 그들의 지금–여기를 따라 난민 캠프의 좁은 골목길을 몸에 새기듯이 거닐어야지. 홀로 결의를 다지며 단출한 장비와 개인짐을 백팩 두 개에 나눠 담았다. 난민 캠프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하면 바퀴 달린 가방은 두고 가야 마땅했다.

로힝야 민족은 미얀마 군부의 핍박을 피해 종교와 문화, 혈통을 공유하는 방글라데시로 대거 탈출했다. 그렇다고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로힝야 난민은 피난처에서도 여전히 배척당하며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난민 캠프에 갇혀 교육의 기회도 취업의 기회도 없이 살았다. 여정을 함께했던 어느 활동가가 말했다. 로힝야들은 살아가고 있다기보다는 죽어가고 있다고. 나치의 수용소는 가스실에서 서둘러 생명을 빼앗아 갔지만 이들은 동물 사육장 같은 난민촌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왔지만 여전히 차별과 핍박이 횡행하니 단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만을 위로 삼아야 하는 처지였다. 
 

공동체를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을 일컫는 이름, 디아스포라
내가 로힝야 난민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는 여러 이유가 겹겹이 쌓여 있을 텐데, 그 근원에는 서경식 선생이 자리한다. 재일조선인 2세인 그는 도쿄경제대 명예교수를 역임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도 저명한 지식인이다.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온갖 불편함과 불온한 시선을 감내하며 ‘조선적’을 유지해 온 선생은 평생을 경계인이자 이산자로 살았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관여한 그를 군부 정권은 반길 수 없었을테니, 오랫동안 대한민국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외국에 나가지 못하고 일본에 갇힌 듯이 살았다고 한다. 선생은 한국과 일본 어디에서도 국민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국민도 아니요 난민도 아닌 반(半)난민 상태로 살아왔다. 그의 많은 명저 가운데 오늘 골라 들어야 할 책은 응당 『디아스포라 기행』일 것이다. 선생의 평생 화두는 ‘디아스포라’였으니, 오랫동안 그를 애독한 내게도 중요한 키워드다.
 

조선 사람들 역시 과거 한 세기 동안 식민지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군사정권에 의한 정치적 억압 등을 경험해, 상당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뿌리의 땅인 한반도로부터 세계 각지로 이산했다.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총수는 현재 대략 600만 명이라고 한다. 재일조선인은 그 일부이며 나는 그중 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이어가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그 개념이 확장돼 공동체를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두루 아우른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강제 동원과 강제 이주,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먹고살 길을 찾아 하와이며 남미까지 떠나야 했던 구한말의 이주 노동자들을 생각해 보면 디아스포라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만 해도 여행이나 출장에서 코리언 디아스포라를 종종 만났었다. 

중앙아시아의 아주 외진 시골을 여행할 때였다.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오더니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양배추로 만든 김치가 들어 있었다. 때마침 장을 봐온 모양이었는데, 한국에서 먹는 김치와 생김새가 달라 추리력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김치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제야 살펴보니 아주머니는 고려인 후손이었다. 단박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현지 민족의 혈통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김치를 먹고 한국말은 전혀 못 하면서도 선조의 나라에서 온 여행자를 호들갑스럽게 환대했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 한 가닥을 비로소 공인받았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또 한번은 어느 시골집 앞을 지나다가 마당에 서 있던 아저씨와 눈을 마주친 채 얼어붙어 한참 있었던 일이 있었다. 서로가 예상하기 힘든 곳에서 맞닥뜨린 한국인의 외모였다. 여행자가 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당황을 지우려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더니 역시나 한국말로 화답해 주셨다. 몇십 년 만에 한국말을 해본다면서,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며. 

그뿐인가. 뉴욕을 여행할 때 한국인 민박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는 가난하게 여행하는 나를 살뜰하게 챙겨줬다. 한국에 있는 아들 생각이 난다며. 아주머니는 작은 집 두어 채를 렌트해 민박을 운영했으니 자본가일 수 없었고 하층 노동자에 가까운 중노동으로 하루를 보냈다. 미국을 벗어나면 영주권을 얻는 데 불리하다며, 한국에 못 간 지 7년이 다 돼간다고 했다. 영주권을 얻으면 중학생인 아들을 불러 함께 살 거라고. 속사정이야 다 알 수 없었지만,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아들을 만날 수 없는 그녀 또한 현대의 디아스포라였다. 그리고 촬영 때문에 중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 조선족과 현지 한국인의 도움을 받으며 일하기 마련인데, 같은 생김새에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모어가 한국어인 사람들끼리 조국(선조의 나라), 고국(태어난 나라), 모국(국적의 나라)의 개념이 뒤엉킨 혼란스러운 대화를 나눈다.

디아스포라들은 이주한 땅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다. 다수자는 대부분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토지,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 안에 있는 한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그 진정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소수자를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행하다 보면 종종 소수자의 서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로힝야 난민 캠프에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마다 입국 절차가 조금씩 다르니 다카 공항에 내려서도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야 했고 입국 심사관 앞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초조한 마음이 일었다. 꼬투리를 잡아 입국을 거부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세관에서는 짐을 압수하거나 터무니없는 관세를 매길지도 모르고. 괜한 걱정이 아니다. 당해본 일이고, 들어본 일이다. 말도 잘 안 통하지, 현지의 법규도 잘 모르니 그저 눈치껏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게 상책이다. 

방글라데시에 처음 가본 것도 아니었는데 공항에서 택시 타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제복 입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내가 타게 된 차는 정식 택시가 아니었다. 운전사 말고도 누군가 조수석에 올라탔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릴 때 추가금을 요구했다. 호텔 리셉션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매니저도 달리 손을 쓰지 못했다. 포장이 다 벗겨져 요철이 극심한 도로, 가로등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은 시커먼 밤, 폐차장에서 몰래 가져온 듯한 노후한 택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수석의 동승자. 사실은 오는 동안 꽤 무서웠다. 소수자의 피로감에 절어 있던 이방인은 결국 얼마간의 돈을 쥐여줘야만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스스로 떠난 여행에서도 이토록 서러움을 맛보는데, 하물며 공동체를 강제로 떠나야 했던 난민들이 겪을 서러움은 어떻겠는가.
 

난민 캠프 안에서도 세상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식물을 좀 찍어보면 어때?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로힝야도 분명 식물을 가꾸고 있을 거야.”

식물원을 집에 들여놓은 것 마냥 식물 가꾸기에 진심인 친구가 건넨 조언이었다. 로힝야들이 가꾸는 식물이 증거가 돼줄 거라고. 여기 엄연히 사람이 존재한다는. 캠프의 좁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며 찬찬히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로힝야들은 자투리 공간을 십분 활용해 먹거리가 열리는 풀을 심거나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를 가꾸는 데 열심이었다. 지붕을 가득 덮은 콩 넝쿨은 기본이고, 저런 데서 자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한 줌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도 있었다. 이토록 척박한데도 가만가만 살아가는 식물은 로힝야 난민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품어주고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묵묵하게, 아낌없이. 

로힝야들 곁에서 틈새를 비집고 자라는 식물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난민 캠프 안에서도 세상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 것처럼. 먹고, 자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꿈꾸고. 살기 위해 수반되는 생의 속성들. 그래서 식물을 곁에 두고 가꾸고, 교육이 금지돼도 몰래 공부방이 열리고, 난민 안에서 난민을 돕는 봉사단체도 만들어진다. 처지가 아무리 궁해도 멀리서 온 여행자를 아낌없이 환대해 주고, 반항심 가득한 십대 아이들은 괜한 인상을 쓰며 몰려다니기도 하고, 길고양이는 세상 무심하게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고. 내가 보진 못했어도 어딘가에선 도둑질 같은 나쁜 일도 일어날 것이고. 
 

식물 사진을 찍다가 문득 깨달았다. 로힝야의 아무개도, 나도, 당신도 그저 똑같은 세계의 일원일 뿐이라고. 로힝야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이 이제 그만 그치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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