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비닐봉지를 모아둔 박스가 있다. 지난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수 김종국이 발코니가 가득 찰 정도로 비닐봉지를 모으고 사는 모습이 방송됐는데, “다 쓸데가 있다”며 못 버리는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는 방송 후 결혼 준비를 하면서 비닐봉지를 다 버렸다는데, 나는 여태 처분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쓰레기 종량제봉투 품귀 사태가 벌어졌다. 혹여 남아 있는 ‘쓰봉’을 다 쓰고 종량제봉투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지자체에서 스티커를 발급받아 버릴 비닐봉지가 넉넉히 있으니 괜히 든든했다. 내 비닐봉지 콜렉션이 자산으로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중동산 원유와 함께 플라스틱의 원료인 나프타 공급이 끊기면서 비닐부터 페인트, 포장 용기, 합성섬유까지 줄줄이 가격이 뛰고 있다. 이른바 ‘나프타 쇼크’다. 중동 사태가 길어지면 비닐봉지 품귀 정도가 아니라 경제 전반을 크게 흔드는 ‘오일 쇼크’로 이어질 수 있다.
나프타 쇼크, 고유가·고금리·고환율 시대 열까?
고유가는 시차를 두고 물가를 끌어올린다. 원유로 만드는 석유제품 가격이 오를 뿐 아니라 물류비, 발전비 등 산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비용도 오른다. 생산 비용과 수입 물가가 함께 오르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진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해외 주요 투자은행(IB) 8곳은 올해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지난 2월 말 평균 2.0%에서 3월 말 2.4%로 0.4%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심지어 JP모건은 “중동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5~9월에는 3%를 웃돌 것”이라 내다봤다. 한국은행도 지난 4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물가상승률이 2%대 중후반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라며 이달 발표할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의 상향 조정을 예고했다.
인플레이션은 통상 금리 인상으로 이어진다. 물가 상승 기대가 퍼지면,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미리 사두려는 ‘가수요’가 인플레이션을 더 자극할 수도 있다. 중앙은행은 경기 침체를 걱정하면서도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고유가·고금리에 고환율 3박자가 맞춰지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증시도 경제성장률도 버틸 힘이 없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던 것도 2차 오일쇼크 1년 뒤인 1980년(-1.7%)이었다. (반대로 저유가·저금리·저환율의 ‘3저’는 1980년대 후반 한국경제 급성장을 뒷받침한다.)
지금은 굴리는 기술보다 버티는 힘이 중요한 때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의 여파에 대해 “최상의 시나리오로 가더라도 예전과 같은 상태로 깔끔하고 완전하게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인플레이션은 서민의 적이라는 말이 있다. 월급, 연금, 예적금 이자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물가가 오를수록 현금 구매력이 떨어져 실질 소득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물 자산을 사두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실물자산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 경기가 후퇴하면 부동산이나 주식 가격도 급락할 수 있어서다. 여기에 금리 상승까지 더해지면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질 테니 금리와 부채 규모도 관리가 필요하다. 안 그래도 변수가 많은 한국경제에 고유가라는 빨간불이 하나 더 켜졌다. 굴리고 버는 기술보다 버티는 힘이 더 중요한 때가 온 것 같다. 아무튼, 우리 집 비닐봉지를 다 쓸 일은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