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제노바는 자신의 여든 살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걸 알게 됩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신경과학(neuroscience)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죠. ‘뇌를 포함한 모든 신경계를 연구하는 학문’에 매달려온 자로서 기억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을 잃어가는 할머니 머릿속이 궁금한 건 당연했습니다. 평생의 기억이 하얗게 지워지는 심정을 꼭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병을 공부합니다. 병원 찾아가 환자를 만나고 환자 따라온 보호자도 만납니다. 귀 기울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힘 기울여 임상사례를 모읍니다. 다행히 그는 글솜씨가 좋았으니 내친김에 소설을 한번 써보기로 합니다. 자신이 만난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속내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여든 살 할머니 대신 쉰 살 대학교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리사 제노바의 생애 첫 소설. 성공한 교수, 사랑받는 아내,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오다 느닷없이 알츠하이머병을 만난 여자의 당혹감과 상실감을 그린 「스틸 앨리스」 (한국 출간 제목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앨리스의 1인칭 시점으로 썼습니다. 환자 ‘가족’의 입장이 아니라 환자 ‘본인’의 입장에서 병의 진행을 기록했습니다. 기억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still)’ 예전의 자신으로 기억되고픈 앨리스의 바람은, 그가 최선을 다해 헤아려본 할머니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영화감독 리처드 글랫저의 손에 들어간 건 2011년 12월의 어느 날. 그해 초근위축성측색경화증, 일명 ‘루게릭병’ 판정을 받은 뒤 모든 행동이 부자유스러워지던 그였습니다. 말과 행동이 점점 더 느려지던 차였습니다. 그때 「스틸 앨리스」 를 읽었습니다. 꼭 영화로 만들고 싶었대요.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기억’을 잃어가는 것과 ‘기력’을 잃어가는 것. 병세는 전혀 다르지만 그 심정만은 완전히 같더라는 겁니다. 더 이상 여전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여전히(still)’ 예전의 자신으로 남아 있고픈 주인공의 간절함이 자기 마음과 똑같았던 겁니다. 결국 오랜 동료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과 함께 소설을 각색, 둘이 함께 연출까지 하게 되죠.
이야기의 큰 줄기는 소설과 같아요. 학교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던 교수 앨리스(줄리앤 무어)에게 갑자기 낯선 경험들이 찾아옵니다. 강의 도중 알맞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떠듬거리거나 아는 사람 이름이 통 생각나지 않는 겁니다. 가장 자신 있는 요리의 레시피를 잠시 까먹기도 하고 남편과 며칠 전에 나눈 대화를 완전히 까먹기도 합니다. 짐작은 건망증, 그러나 진단은 알츠하이머.
병의 진행속도는 빠른데 앨리스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더디기만 합니다. 엄마가 더 많은 실수를 하기 전에 요양원에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가족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엄마가 무엇을 기억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엄마가 어떻게 기억되느냐도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해요. 병이 더 악화되기 전, 알츠하이머 환우모임에서 엄마가 했던 연설을 또렷이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해보겠습니다.
“예전의 우리 모습에서 멀어진 현재의 우리는 우스꽝스럽습니다. 우리의 이상한 행동과 더듬거리는 말투는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인식을 바꾸고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인식까지 바꿉니다. 우린 바보처럼 무능해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일 뿐이죠. (중략) 그래도 지금 전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기억을 못하는 제 자신을 질책하곤 하지만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순간도 있습니다. 제가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저는 이 대사를 참 좋아합니다. “전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I am not suffering. I am struggling).” 자신을 그저 ‘아픈’ 사람으로만 보지 말고 ‘애쓰는’ 사람으로 보아 달라는 부탁.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계속 응원해 달라는 당부이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먼저 포기하진 말아 달라는 호소. 요양원을 알아본 가족들은, 특히 막내딸은 바로 이 부탁과 당부와 호소가 마음에 걸려 자꾸 망설입니다. 자신들의 고단한 ‘간병’을 회피하기 전에 환자 본인의 고귀한 ‘투병’을 최대한 존중하려 애씁니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가장 근사한 미덕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 시점으로 쓴 소설처럼, 영화 또한 마지막까지 환자 본인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를 ‘지켜보는’ 슬픔이 아니라 알츠하이머 환자로 ‘살아내는’ 시간에 집중하는 영화입니다.
앨리스가 어느 날 남편 품에 안겨 말합니다. “당신 내년에 안식년 할래?” 1년 휴가 내고 둘이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
<스틸 앨리스>의 촬영을 시작할 당시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이미 손과 팔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죠. ‘겨우 손가락 하나로 간신히 타이핑만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소임을 다했다고 해요. 글을 말로 바꿔주는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 현장을 지휘했고, 휠체어에 앉은 채로 고된 촬영현장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유작이 될 이 영화를 완성해 놓고 지난 3월 끝내 고인이 되고 만 리처드 글랫저. ‘그가 그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온전히 바쳐 만든 영화 <스틸 앨리스>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혹독한 겨울의 한가운데에서도 내 안에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뜨거운 여름이 꿈틀거리고 있다.” 알베르 카뮈가한 말입니다. 한 영화감독의 ‘뜨거운 여름’이, 앨리스의 ‘뜨거운 여름’을 만나 <스틸 앨리스>가 되었습니다. ‘혹독한 겨울’의 한가운데에서도 참 사려 깊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영화입니다. ‘당신이 당신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들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꼭 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