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일깨워 줬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 등으로 수출을 늘리고 있지만, 그 산업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대부분 해외에서 들여온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93%를 넘고, 원유·천연가스·석탄 등 화석연료는 사실상 전량 수입한다. 에너지 총수입액도 연간 1,600억 달러를 넘는다. 수출이 늘어도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 무역수지, 물가, 기업 수익성은 동시에 압박받는다.
반도체와 AI 특수로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졌다. 반도체산업은 EUV 노광장비, 클린룸, 냉각 설비 등에 막대한 전력을 사용한다. 국내 반도체산업의 추가 전력 수요는 약 20GW이며, 여기에 AI 데이터센터 수요까지 고려해야 한다. 국내 최대전력 수요가 현재 100GW 수준이므로 이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물리적인 에너지 운송도 큰 걱정거리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전 세계 석유 공급의 5분의 1이 막혀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임목(choke point)이 여러 곳인 데다 갈수록 지정학적 불안 요인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에너지정책은 에너지 공급 확대, 수입 의존도 감소, 화석연료 공급 차질과 충격 등의 복잡한 과제를 풀어야 한다. 방향은 명확하다. 이제는 수입 화석연료 의존도를 확실하게 줄여야만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산업 구조와 경제 체질의 대전환을 피할 수 없으므로 명확한 비전과 정교한 전략으로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화석연료 의존을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은 전기화다. 전기화란 석탄, 석유, 가스를 직접 태워 열과 동력을 얻는 방식을 줄이고, 전기를 이용하는 활동을 더 늘리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전기는 사용 지점에서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는다. 모터를 돌리고, 열을 만들고, 조명을 켜고, 데이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연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제어가 쉽고 효율이 높다. KTX, 전기차, 로봇, 데이터센터 모두 전기의 정밀한 제어 능력 위에서 작동한다.
전기화가 필요한 두 가지 이유:
사용 시 오염물질 배출 없고 내연기관보다 효율성 높아
탈화석연료를 달성하기 위해 전기화를 주창하는 이유는 물리학적인 원리 때문이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주유한 에너지의 20% 안팎만 실제 주행에 쓰지만, 전기차는 충전한 전기의 80% 이상을 구동과 냉난방에 활용할 수 있다. 히트펌프도 비슷하다. 전기로 열을 직접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외부의 열을 내부로 이동시키기 때문에 같은 난방 수요를 더 적은 에너지로 충족할 수 있다. 초기에는 투자비가 들고 전환 과정에서 다소 불편함이 발생하지만, 높은 효율의 전기는 결국 경제적 실익으로 돌아온다. 깨끗한 환경은 덤이다. 게다가 국내에서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고 그만큼 화석연료를 수입하지 않는다면 경제적·환경적 실익과 함께 에너지 안보를 개선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다만 전기화에는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 전기차를 늘리려면 충전 인프라와 배전망을 보강해야 한다. 산업용 히트펌프를 보급하려면 공정 온도, 설비 교체 주기, 전기요금 구조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처럼 고온 열과 환원제가 필요한 산업은 당장은 전기화가 어렵다. 따라서 실질적인 산업 현장의 여건을 고려한 전기화가 진행돼야 한다. 혁신 기술과 상업화를 통해 원가 경쟁력이 확보돼야 하므로, 정부는 연구개발(R&D)과 실증을 지원하고 초기 시장을 만들어 전환 비용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부담을 나눠야 한다.
전기화가 진행될수록 전기를 어떻게 만들지가 중요해진다. 화석연료를 줄이기 위해 전기를 쓰는데, 그 전기를 석탄과 액화천연가스(LNG)로 만든다면 효과는 제한된다. 결국 원자력, 재생에너지, 전력망, 저장장치, 수요관리를 함께 묶은 전력 공급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2024년 한국의 총발전량은 약 596TWh였고, 원자력은 약 189TWh로 전체의 31.7%를 차지했다. 가스와 석탄도 각각 28% 안팎을 담당했다. 같은 해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약 63TWh로 전체 발전 비중 가운데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태양광과 풍력만 보더라도 전체 발전량의 8%에 불과했다.
원전은 중요한 자산이다. 연료비 비중이 낮고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한국 원전은 표준화, 시공 경험, 기자재 공급망, 운영 역량을 오랜 기간 쌓으며 경쟁력을 갖췄다. 그러나 원전도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전원이다. 초기 투자비가 크고, 금융 비용과 공기, 발전소 수명에 따라 발전원가 변동 폭이 커진다. 부지 확보, 인허가, 안전 규제, 사용후핵연료, 지역 수용성은 난제이며 현실적으로 국가의 직간접적인 개입이 있어야만 확대가 가능하다. 현재의 공급망 역량을 유지하면서 설계, 제작, 시공, 운영, 해체, 폐기물 관리까지 이어지는 원자력 발전 전 과정의 불안 요소와 대외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핵연료를 2년 이상 비축할 순 있어도 핵심원료를 100% 수입에 의존하고 공급국과 기업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무엇보다 재생에너지의 장단점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은 연료비가 없고 탄소를 배출하지 않지만 변동성이 있다. 국내에서는 입지 제약, 주민 수용성, 계통 접속 지연, 중국산 기자재 의존, 금융 비용 문제가 겹쳐 있어 대규모 보급 확대에 대한 찬반 여론이 비등하다. 하지만 연료 문제가 없고 기술 발전과 원가 하락 속도가 빠르며, 발전 원가를 고정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당장은 에너지 안보가 전 세계적으로 화두지만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제조업 분야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 것도 과제다. 탄소배출권과 탄소세 등으로 탄소 비용을 책정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반영한다면 우리 산업의 수출 경쟁력에 큰 타격이 예상된다. 그러므로 재생에너지 확대는 수출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필수다.
우리의 무탄소 에너지원을 전부 활용해야지, 대립구도로 만들 필요는 없다. 원전도 재생에너지도 늘려야 한다. 특정 전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기술, 사고, 연료, 입지, 규제 변화에 취약해진다. 원전만으로도 재생에너지만으로도 단기간에 모든 문제를 풀기 어렵다. 원전의 비중을 안정적으로 유지·확대하면서 재생에너지 비용을 낮추고, 전력망과 저장장치를 보강하며, 수요관리 기술을 함께 키워야 한다. 재생에너지 공급망의 국산화를 원전 수준까지 높여야 한다. 재생에너지 시설을 위해 토지를 제공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주민들을 배려하면서 두 전원의 공존을 위한 전력망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무탄소 에너지원을 대립구도로 만들 필요는 없어…
전환 비용은 산업 기회로 삼고 패키지 설계로 전력망 병목 관리를
에너지 구조 대전환은 투자와 비용을 요구한다. 송전망을 새로 깔아야 하고, 노후 발전소를 조정해야 하며, 산업 설비를 바꾸고, 지역 갈등도 조정해야 한다. 전기요금도 일정 부분 현실화가 필요할 수 있다. 이런 비용을 숨기면 정책은 오래가기 어렵다. 국민에게 전환의 필요성과 부담, 보상 방식을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특히 재생에너지 입지가 들어서는 지역,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 발전소가 있는 지역에는 실질적인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
전력망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병목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발전 설비를 지어도 송전망이 없으면 전기를 보낼 수 없다. 재생에너지가 늘수록 계통 운영은 복잡해지고,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가 늘수록 특정 지역의 전력 수요는 급증한다. 송전선, 변전소, 배전망,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 반응, 전력시장 제도 개편을 하나의 패키지로 설계해야 한다.
공급망 전략도 중요하다. 태양광, 배터리, 전력변환장치, 해상풍력 하부구조물, 초고압 케이블, 변압기, 원전 기자재, 수소 설비 모두 새로운 산업 시장이다. 중국의 태양광·배터리·희토류 공급망 지배 우려가 커지는 상황은 위험이자 기회다. 우리가 기술과 기자재를 국산화하고 이를 해외시장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에너지 전환은 비용 부담이 아니라 수출 산업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결국 에너지 구조 대전환의 핵심은 속도보다 방향과 일관성이다. 화석연료 수입 의존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다. 원전도 재생에너지도 단기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산업 전기화는 기술과 비용의 벽을 넘어야 하고, 전력망 투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차분하게 준비해야 한다. 탈화석연료로 가는 길은 부담스럽지만 피하기 어렵다. 이 길을 안보 전략이자 산업 전략으로 설계해야 한다. 전기의 시대는 시작됐고, 화석연료 공급 불안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한국이 에너지 전환 시대의 승자가 되려면 결단과 행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