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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여행 한 페이지계획의 바깥을 걷다 보면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6년 05월호

이란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광장 둘레의 회랑에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벽면 타일에 새겨진 청금색 문양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시간. 노인은 광장 귀퉁이 돌계단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낡은 책 한 권을 무릎 위에 펼쳐놓고. 내가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는 몸짓을 하자 그는 조용한 미소로 환대하며 자리를 내어줬다. 

잠시 후 노인이 내 쪽으로 책을 내밀었다. 페르시아어가 빼곡한 책.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한 줄을 천천히 짚었다. 그리고 물었다. “파르시 발라디?” 페르시아어를 아냐는 말. 이란을 여행하는 동안 하도 들어서 익힌 문장이었다. 노인의 온화한 표정에 화답하듯 웃음지으며 답했다. “파르시 발라드 니쌈.” 페르시아어를 모른다는 말. 그럼에도 노인은 페르시아어로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줬다. 뜻은 몰라도 아름다운 파열음을 가진 언어였다. 

노인은 언어에 기대기보다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설명이 아니라 나눔 같은 것, 번역할 수 없지만 전달되는 것. 나는 그 행을 손가락으로 따라 짚었다. 활자의 감촉이 느껴졌다. 노인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느리고 깊게. 그것이 이란 사람들이 점을 치듯 펼쳐 읽는 14세기의 시인, 하페즈의 시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아직도 이맘 광장이 있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자유롭게 걸어 들어갈 수 없는 땅이 됐다. 이란은 오랫동안 여행 자제 국가였다가 최근엔 외교부 여행 경보의 최고 단계인 여행 금지 국가가 됐으니까. 노인이 요즘도 광장에 나와 시집을 펼치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손에 닿던 그의 손가락 감촉만은 선연하다. 

중동을 처음 여행한 것은 서른이 되고 나서다. 긴 여행이라 경비가 넉넉지 않았고, 가이드북도 허술했으며, 아랍어도 페르시아어도 한마디 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거기서 사람들의 온기에 압도됐다. 골목을 헤매다 보면 길을 잃기 마련이었는데, 그럴 때면 누군가 나타나 몇십 분이 걸려도 함께 걸어 목적지에 데려다줬다. 중동에 숱한 동네 찻집에서 만난 이웃들은 서로 나서서 내 여행이 불편하지 않게 마음을 써줬다. 말은 거의 통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한결같은 환대는 잘 전달됐다. 

그토록 좋았던 중동 여행. 하지만 그때를 반추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많은 나라가 이제 갈 수 없는 땅이 됐으니까. 시리아가 그렇고, 예멘이 그렇고, 이라크는 원래 그랬고, 이제는 이란이 그렇다. 출국 권고를 넘어 여행 금지가 된 나라들. 그곳의 후미진 골목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아 있기나 한지 알 수 없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몸은 떠날 때의 몸과 다르다. 여행지 골목의 공기, 현지 사람들의 얼굴, 그 손가락의 감촉 같은 것들이 몸 안 어딘가에 박혀서 함께 돌아온다. 몸에 새겨진 것들이라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몸을 맡기라고 독려하는 책
아즈마 히로키의 『약한 연결』을 펼쳤을 때, 이맘 광장의 노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즈마는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다. 서브컬처부터 정치철학까지 종횡무진하는 그의 사유는 때로 난해하기도 하지만 『약한 연결』은 의외로 얇고, 의외로 쉽고, 의외로 깊다. 

책의 논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아는 것만 검색할 수 있다는 것. 모르는 것을 검색창에 입력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검색은 언제나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 상상할 수 있는 단어를 동원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내 안의 세계를 넓히려면 스마트폰 화면 밖으로, 이국의 후미진 골목 안으로 몸을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전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몸을 맡겨야 한다. 아즈마는 그런 만남을 ‘약한 연결’이라 부른다. 

약한 연결은 미국의 사회학자 마크 그래노베터가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처럼 깊고 끈끈한 관계가 ‘강한 연결’이라면, 잠깐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와의 관계는 ‘약한 연결’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연구 결과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거나 예상치 못한 기회를 얻는 것은 대부분 강한 연결이 아니라 약한 연결을 통해서라는 것. 강하게 연결된 사람들은 대개 같은 정보망 안에 있다. 그들은 비슷한 것을 알고, 비슷한 것을 좋아하며, 비슷한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문은 그 바깥에 있는 느슨하고 우연한 관계들이 열어준다. 

아즈마는 이 통찰을 여행에 적용한다. 여행이 우리에게 새로운 검색어를 안겨주려면 계획의 바깥을 걸어야 한다. 미리 짜인 일정을 충실히 따르는 여행은 집에서 검색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예약한 숙소로 돌아가는 여행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여행은 예측 불가능한 우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노인의 시 낭송을 듣는 것,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골목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것, 그리고 만날 예정에 없던 사람의 수십 분이라는 시간을 염치 불고하고 가져다 쓰는 것.
 

 

여행자의 만남이란 그토록 가벼운 약한 연결이었다
요르단의 와디럼 사막에서 베두인 아낙들에게 홍차를 얻어 마신 적이 있다. 붉은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황야의 바위산 어느 한 귀퉁이, 거기서 사람을 맞닥뜨린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문득 바위산을 올라가 보고 싶었고, 그녀들은 어딘가 마실을 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곳에 흩어져 앉아 홍차를 끓여 마셨다. 그녀들과 나 사이에 오간 것은 서로 조금도 통하지 않는 단어 몇 개와 온갖 손짓, 발짓, 몸짓, 그리고 많은 침묵이었다. 그녀 중 하나는 결혼해서 아이가 이만큼이나 큰데 그녀보다 언니인 다른 여성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며, 나에게 결혼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실없는 농담 속에서도 꽤나 적극적으로 중매에 나섰다. 웃으며 말했지만 눈은 진지하게 빛났으니까. 나는 웃었고, 그녀들도 웃었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갔고, 홍차 향이 멀리 흩어졌다. 우리는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갔고, 손을 흔들며 각자의 길을 나섰다. 그것이 전부였다. 여행자의 만남이란 그토록 가벼운 약한 연결이었다. 

나는 여전히 중동의 역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무슬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곳의 정세를 세련되게 파악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여행 이후론 중동 뉴스가 다르게 들린다. 뉴스에서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비출 때마다, 이란 전쟁의 사상자 숫자가 흘러나올 때마다, 중동에서 만났던 약한 연결의 얼굴을 떠올린다. 와디럼에서 만났던 아낙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그녀가 결혼은 했을지, 그날 마실은 잘 다녀왔는지조차 알 길이 없지만, 뉴스 속의 막연한 사상자 숫자는 그만큼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라는 것을 감각한다. 그것이 중동 여행이 내게 남긴 유산이다. 
 

아즈마는 여행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 ‘감도’라고 표현한다. 세계를 감지하는 안테나가 새로운 방향을 향해 돌아서는 것. 그 감도의 변화가 이후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귀 기울이는지를, 어떤 뉴스에 마음이 쓰이는지를, 어떤 이름 앞에서 가슴이 조여드는지를 조용히 바꾼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라고. 

깊이 묶이지 않아 오히려 더 자유로운,
기약 없는 만남이어서 오히려 더 온전한 

카페에서 『약한 연결』을 읽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널찍한 통창 너머로 서울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거리 너머 어딘가에 예멘 사나의 골목과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골목이, 그리고 하페즈의 시를 읽는 소리가 흐르는 이스파한의 골목이 겹쳐 보였다. 지금 그 골목들은 외교부의 지도에서 여행 금지를 뜻하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사나는 폭격당했고, 다마스쿠스는 내전 이후의 긴 혼돈 속에 있고, 이란은 여전히 긴장의 한가운데에 있다. 내가 걸었던 골목들, 앉았던 돌계단이 그대로 있는지 알 수 없다. 갈 수 없는 땅이 생길 때마다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약한 연결 속의 사람들. 그들이 오늘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중동발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치솟는 환율과 폭락하는 주가, 내 차에 넣을 기름값 걱정에 앞서.

아즈마 히로키가 『약한 연결』에서 말하는 것의 본질이 어쩌면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약한 연결은 결코 가벼운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강도가 아니라 관계의 성격에 관한 이야기다. 깊이 묶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유롭게 다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연결.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온기. 기약 없는 만남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온전히 존재하는 관계다. 
 

 
중동의 골목에서 그것을 많이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골목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갈 수 없는 곳이 늘어날 때마다 여행은 더 간절해진다. 닫힌 골목들이 많아질수록, 아직 열려 있는 골목들이 더 소중해진다. 여행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느끼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때때로 이렇게 여행자를 아프게 한다. 원고를 쓰기 위해 외교부의 여행 경보 지도를 살펴보다 새삼 놀랐다. 지도엔 여행 유의, 여행 자제, 출국 권고, 여행 금지 등 단계에 따라 다른 색이 칠해져 있다. 경보에 들지 않아 편히 여행해도 되는 나라만 흰색으로 남아 있는데, 세계에서 흰색인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토록 무참한 시절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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