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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EU, 단일 통화에 더해 재정연합으로 진화할까?
고상현 주벨기에EU대사관 겸 주NATO대표부 재경관 2026년 06월호
‘차세대 EU’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공동채권 발행은 회원국을 대상으로 대출과 함께 보조금 형태로도 재원을 지원하고, 보조금으로 지원한 부분에 대해서는 채권의 원리금 상환도 EU가 담당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개별 국가 차원의 재정 여력을 초과하는 외부 충격을 EU 차원에서 분산 수용했다는 점에서 공동부채 발행을 통한 재정 이전의 기틀을 마련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EU는 역사상 유례없는 초국가적 경제 통합체로서의 실험을 지속해 왔다. 1992년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Treaty of Maastricht)은 EU 경제 거버넌스의 근간을 형성하며 통화정책은 유럽중앙은행(ECB)으로 통합하되 재정정책은 각 회원국의 고유 권한으로 남겨두는 이원적 구조를 확립했다. 이는 보조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에 따라 각국의 재정 주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물가 안정이라는 단일 목표 아래 거시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복합 위기는 이러한 분리된 거버넌스의 한계를 드러내며 EU 재정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발하고 있다.

통화는 통합, 재정은 회원국 권한으로 남겼던 EU… 
코로나19로 공동채권 발행하면서 재정체계 변화

EU 예산체계는 일반적인 주권 국가와는 차별화된 엄격한 규칙 기반 거버넌스를 특징으로 한다. EU는 7년 주기인 다년도 지출 예산(MFF)을 통해 중장기 정책 우선순위를 설정하며 이를 바탕으로 매 회계연도 예산을 편성한다. 특히 「EU 기능에 관한 조약(TFEU; Treaty on the Functioning of the European Union)」 제310조에 명시된 ‘균형예산 원칙(Balanced Budget Rule)’은 지출이 자체 수입 범위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해 EU 차원의 국채 발행을 통한 적자 재정 운영을 원칙적으로 차단해 왔다.

현재 EU 예산의 주요 재원은 회원국들이 출연하는 ‘자체 수입’으로 구성된다. 역외 수입품에 부과되는 공통 관세 및 부가가치세 기반 재원, 그리고 각국의 경제 규모에 비례하는 국민총소득(GNI) 기반 분담금 등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국민총소득 기반 기여금은 전체 수입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재정적 연대의 핵심 축을 담당해 왔으나 그와 동시에 EU 재정이 회원국의 기여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게 했다.
 

전통적인 균형예산 원칙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난 계기는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된 ‘차세대 EU(NGEU; Next Generation EU)’였다. NGEU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강력하고 현대적인 유럽을 만들기 위해 도입된 역대 최대 규모의 일시적인 경제회복 지원 프로그램이다. 2021년부터 2026년까지 6년간 한시적으로 약 8천억 유로를 회원국에 보조금 또는 대출로 지원해 회원국들의 그린 및 디지털 전환과 복원력 강화를 지원한다.

NGEU의 실질적인 집행을 담당하는 ‘경제회복 및 복원 기금(RRF)’은 단순한 자금 배분을 넘어 EU 재정 거버넌스의 질적 변화를 상징한다. 이 기금은 각 회원국이 제출한 ‘국가 경제회복 및 복원 계획(NRRP)’에 명시된 구체적인 구조개혁 및 투자 목표를 달성해야만 자금을 집행하는 성과 연동형 시스템을 도입했다. 특히 전체 지출의 37% 이상을 기후 변화 대응에, 20% 이상을 디지털 전환에 의무적으로 할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EU 집행위가 개별 회원국의 예산 우선순위에 개입해 산업 구조의 현대화를 실질적으로 유도하는 조정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NGEU는 위기 극복을 위한 재원을 매개로 회원국의 재정정책을 EU 전체의 전략적 목표와 강하게 동기화하는 제도적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NGEU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재원은 전체 회원국의 신용을 담보로 한 대규모 공동채권 발행을 통해 조성됐다. 이전에도 EU는 역외 국가 지원을 위한 거시금융지원(MFA; Macro-Financial Assistance) 등을 목적으로 소규모 프로젝트 기반의 채권을 단발적으로 발행해 왔으나 이는 자금 지원을 받은 국가가 원리금을 직접 상환하는 단순 중개 방식에 국한됐다. 따라서 EU 차원의 공동부채라는 인식이 약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NGEU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공동채권 발행은 회원국을 대상으로 대출과 함께 보조금 형태로도 재원을 지원하고, 보조금으로 지원한 부분에 대해서는 채권의 원리금 상환도 EU가 담당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는 개별 국가 차원의 재정 여력을 초과하는 외부 충격을 EU 차원에서 분산 수용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긴급 구제를 넘어 공동부채 발행을 통한 재정 이전의 기틀을 마련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EU 채권 국제적 지위 강화 위해 경매, 레포 데스크 도입, 
그린·디지털 전환 등으로 재정 지출의 질적 전환도 추진

이러한 변화는 일회성 조치에 그치지 않고 체계적인 제도 안착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EU는 채권 발행을 특정 대출 프로그램에 직접 연계하는 백투백(Back-to-Back) 발행체계에서 벗어나 2023년부터 모든 자금 조달을 단일 창구로 통합 관리하는 ‘단일 접근 방식’으로 전격 개편했다. 나아가 EU 집행위는 EU 채권을 글로벌 자본시장의 핵심적인 안전 자산이자 공신력 있는 벤치마크로 격상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제도 개선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채발행시장의 표준인 경매 방식을 도입하고 시장 조성자 시스템을 강화해 발행의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을 높였다. 또한 채권시장의 유동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레포 데스크(Repo Desk)를 구축하는 등 유통시장 활성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시장 참여자들이 EU 채권을 담보로 자금을 원활히 조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국채에 준하는 시장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발행체계의 고도화는 유로화 자산의 깊이를 더하며 유로화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동안 유로존 내 안전 자산 수요는 독일 국채 등에 과도하게 편중돼 있었으나 높은 신용도를 갖춘 EU 공동채권의 공급 확대는 자본시장의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나아가 단일화된 EU 채권 벤치마크 형성은 역내 금융기관들이 담보로 활용할 수 있는 표준 자산을 제공함으로써 유럽 자본시장동맹(CMU; Capital Markets Union) 구축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이는 위기 시 회원국 간 국채 금리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는 시장 분절화 현상을 완화하는 거시경제적 안정판 역할을 수행하며 종국에는 유럽 금융시장의 통합을 심화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정 지출의 질적 측면에서도 구조적인 변화가 관측된다. 과거 EU 예산은 공동농업정책(CAP)과 회원국 간 경제적 격차 완화를 위한 결속정책에 지출의 과반을 할애해 왔다. 그러나 최근 예산 편성 기조는 유럽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전략적 자율성 확보로 급격히 재편되는 양상이다. 올해 예산은 이러한 중장기적 전환 국면을 보여준다.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역내 최대 연구 지원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을 통해 과학기술 패권 경쟁에 대응하고 있다. 특히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과 AI 및 차세대 네트워크 등 디지털 전환 분야에 집중적으로 재정이 투입되고 있다. 또한 국방 및 안보, 이주 및 국경 관리 등 대외 관계와 안보 분야 예산의 점진적 확대는 EU 재정이 회원국의 단순한 보완재를 넘어 핵심적인 전략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신규수입원 도입, 세수 증대 넘어 EU 핵심 가치 실현…
부채 정례화에 따른 도덕적 해이 우려 등은 과제

공동채권 발행은 필연적으로 원리금 상환을 위한 안정적 재원 확보라는 과제를 수반한다. 이에 EU 집행위는 차기 다년도 지출 예산(2028~2034년) 논의 과정에서 자체 신규 수입원 도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탄소배출권 거래제(ETS) 수익,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수입, 그리고 일정 규모 이상의 연간 매출액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에 부과하는 분담금(CORE) 등이 논의되고 있다. 이처럼 도입 추진 중인 신규 수입원들은 단순한 세수 증대 목적을 넘어 EU의 핵심 정책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유인 기제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어 탄소국경조정제도나 탄소배출권 거래제 기반 재원은 환경 오염자 부담 원칙을 역외로 확장해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을 보호함과 동시에 글로벌 기후 행동을 선도하려는 전략적 수단이다. 또한 연간 매출액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에 대한 분담금 논의는 글로벌 최저한세 도입 등 국제 조세체계의 변화 속에서 EU 단일시장의 이익을 재투자하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이러한 독자적인 재원 확보 시도는 EU가 회원국의 분담금 갹출이라는 수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재정을 통해 역내 산업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유도하는 능동적 경제 주체로 진화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신규 수입원 도입은 EU 재정이 회원국의 직접 분담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재정 자율성을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만약 독자적인 징세권에 준하는 수입원이 확립된다면 이는 재정정책의 무게중심이 회원국에서 EU 중앙 거버넌스로 이동하는 실질적인 ‘재정 연합’으로의 진화를 의미하게 된다.

현재 EU 재정정책이 보여주는 변화의 궤적은 명확하다. 위기 때마다 예외적으로 허용됐던 제도적 융통성은 이제 새로운 재정 운용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며 통합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물론 재정 주권의 이양에 따른 유럽 북부와 남부 국가 간의 정치적 갈등, 그리고 공동부채의 정례화가 야기할 수 있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글로벌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환경 속에서 개별 국가 재정만으로는 공동의 안보와 경제적 경쟁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통화라는 단일 축으로 유지되던 유럽 통합의 건축물은 이제 재정이라는 또 다른 기둥을 세우며 더욱 견고한 경제 통합체로 진화하고 있다. EU 재정정책이 보여주는 연대와 전략적 투자의 조화는 향후 유럽의 정치·경제적 통합 수준을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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